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덴플라테 공세 (문단 편집) == 당시 상황 == 당시 독일군은 1944년 12월 중순부터 개시된 [[벨기에]] 아르덴 지방을 공격해 서부전선에 큰 돌출부를 뚫고 있었다. 작전 초기에는 북부의 제6기갑군과 남부의 제5기갑군ㆍ7군이 빠르게 전진하기는 했으나, 문제는 항공 전력이었다. 당시 독일 공군은 잔존 항공 전력이 거의 남아 있지 못했다. 이유는 [[영국 본토 항공전]] 직후 서부전선의 공군이 대거 [[동부전선]]에 배치됐는데, 1943년 이후로 육군이 그렇듯 공군도 완전히 박살나 사실상 대규모 항공전을 벌이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오히려 전투기는 없는데 공군 사병들이나 놀고 있는 신입 조종사들이 더 많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공군 정예 조종사들이 44년도쯤엔 거의 바닥을 칠 정도의 숫자만 유지되고 있어 이 시기의 공군조종사는 겨우 항공기를 이착륙 시킬 정도의 능력만 가진 신참 조종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육군에 대한 지상지원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는 듯이 어떤 트집이라도 잡아서 빨리 복귀하고자 했다. 그리고 날씨도 한몫을 해 주셨다. 12월이 겨울인 데다가 벨기에는 [[유럽]]에서도 추운 지역에 해당하다 보니 눈이 자주 내려 항공기들이 출격하기 좋은 날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독일 공군이 아르덴 대공세 기간 중에 출격한 횟수 중에서는 공세 첫날에는 겨우 170회 남짓한 주간 출격에, 17일에 운 좋게 600회 주간 출격을 달성하였다. 또한 연합군 공군의 출격 횟수는 독일 공군과 비슷하게 제대로 근접 지상 지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겨우 공세 첫 주 동안 450회의 출격만 기록했다. 하지만, 12월 23일에 날씨가 개자마자 연합군 공군은 미친 듯한 출격 횟수를 보여주었는데, 이들의 출격 횟수는 아르덴 전투 내내 약 34,100회를 달성했다. 반면, 독일 공군은 겨우 7,500회 남짓이었다. 그리고 위에 서술했듯이 신참조종사들이 한몫 해주어 날씨가 풀린 12월 23일 이후부터도 항공기의 지상지원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독일 공군은 기상 탓으로 인해 최전방의 정예 부대에게도 항공기 지원은커녕 보급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러다 보니 독일군의 기계화 부대들은 곳곳에서 정지하고 난리가 아니었다.[* 당시, 벨기에는 [[러시아]]처럼 땅이 얼어붙었다가 해동되면 상태가 영 좋지 않게 되어 보급 차량이 이동하기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되어 버리곤 했다.] 그래서 독일군은 유일하게 항공 보급만이 최전방 부대에게 보급을 전달해 줄 수단이었는데, 끝내 공군의 보급이 없다 보니 공세 기간 중 북부의 공세를 맡은 파이퍼 전투단[* Kampfgruppe Peiper. [[무장친위대]]의 [[요아힘 파이퍼]] [[대령]]이 창설한 부대이다.]은 제대로 보급도 받지 못한 채 포위되어 공격받았고, 그 외의 다른 부대들도 연합군의 물량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각개격파당했다. 결국, 독일 공군은 [[자포자기|아몰랑, 일단 쏘면 뭐라도 되겠지]]라는 심정으로, 1945년 1월 1일에 공습 부대에서도 최정예 KG 51(51폭격항공단)와 [[JG 3]](3전투항공단)을 투입하게 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